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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김정수 칼럼-

2014.11.04 16:01

wind 조회 수:5308

신라 서라벌 근처에 세달사(世達寺: 지금의 興敎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의 농장이 명주(溟州)에 있어서 본사에서는 조신이라는 스님을 농장 감독으로 보냈다. 그런데 스님이 어느날 그 지방 태수 김흔(金昕)의 딸을 먼 빛으로 보고 그만 반해버렸다. 그래서 낙산사(洛山寺) 관음보살(觀音普薩)상 앞에서 그녀와 인연을 맻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몇 년 동안을 정성을 다해 빌었으나 들려온 소식은 태수의 딸이 좋은 곳에 혼처가 나서 얼마전 시집을 갔다는 것. 조신은 그만 낙담을 하여 관음상 앞에서 “이럴 수가 있냐”고 화를 내며 원망하여 슬피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잠결에 누가 깨워서 눈을 떠보니, 아! 글쎄, 그 태수의 딸이 활짝 웃으며 서있는 것이 아닌가?

“내 일찍이 스님을 보고 사랑하여 잊지를 못했지만 부모의 명에 못이겨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스님과 부부가 되고자 왔으니 같이 도망가서 삽시다.” 조신이 미칠 듯이 기뻐서 이 아가씨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40 여년을 재미있게 살면서 아이를 5명이나 두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점점 가난해지더니 나중에는 먹을 것 잠잘 곳 조차 없어졌다. 그래서 식구들을 이끌고 빌어 먹으며 한 10년을 돌아다니니 꼴은 거지중에 상거지.

그러다가 명주 해현령(蟹縣嶺)을 지날 때 15세 된 큰아이가 굶어 죽었다. 조신은 얼마나 기가 막히는지 가슴을 치고 울면서 아이를 길가에 묻었다. 나머지 4 자녀를 데리고 부부는 우곡현(羽曲縣: 지금의 우현)에 이르러 길가에 볏집을 짓고 살았는데 부부가 늙고 병들어서 거동하기가 힘드니까10살 난 딸이 밥을 빌어다가 식구들을 먹였다. 그러나 어느날 밥을 구걸하려 다니던 딸이 마을 개에게 물렸다. 아이가 아픔을 참지 못하고 울부짖으며 돌아와서 들어누으니 부모도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참 울다가 부인이 눈물을 씻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는 얼굴고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옷도 깨끗했습니다. 집을 나온지 50년, 정도 깊어지고 사랑도 굳어졌으나 근년에 와서는 굼주림으로 몸도 쇠약해지고 추위도 날로 더해 오는데 걸식하는 부끄러움이 산과도 같이 무겁습니다. 붉은 얼굴과 아리따운 웃음도 풀잎의 이슬이요, 지초(芝草)와 난초같은 굳은 언약도 버들가지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하니 엣날에 기쁘던 일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나 봅니다. 당신과 내가 어찌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이제 당신은 내가 있어서 누(累)가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더 근심이 됩니다. 우리 여섯 식구가 함게 다니면 모두 굶어 죽게생겼으니 이제 헤어져서 각기 살길을 찾아 봅시다.”

그래서 아이 둘 씩 맡아 아내는 친정이 있는 방향으로 가고 조신은 남쪽으로 울며 떠나다가 그만 잠이 깨었다. 이미 아침 예불을 알리는 인경 소리가 산사에 울려 퍼지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밤새 머릿 털이 하얗게 세었다. 하룻밤 꿈에서 인생 50년을 산 것이다. 인생무상, 즐거움도 괴로움도 다만 한 마당의 꿈이라는 것을 깨닿고 보니 세상사에 집착하는 마음이 눈녹듯이 사라진다. “있지도 않은 자식을 잃었다고 그렇게 슬피 울었구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조화인 것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상 앞에서 한없이 참회하고 해현령에 가서 아이를 묻은 곳을 파보니 거기에 돌 미륵이 있었다고. 고려 때 일연 스님이 쓰신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얘기이다.

춘원 이광수가 이 설화를 바탕으로 <꿈>이라는 단편 소설을 발표한 것은 해방된지 얼마안된 1947년이다. 이광수는 1918년 2.8 독립선언을 주도하였고, 1919년 상해임시정부 설립에 참여하여 임정 홍보국장과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한 항일민족주의자였으나 임시정부의 열악한 재정형편과 임정내부의 파벌 싸움에 실망한데다가 당시 국제사회에서 욱일승천하는 일본의 기세를 보며 조국 광복은 전혀 희망이 없다고 느꼈다.

그러던 중 두번 째 부인이 된 당시 최초의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이 상해까지 와서 설득함으로 춘원은1921년 귀국하였다. 그리고 귀국한 춘원은 한동안 글만 열심히 썻으나 일제의 계속되는 회유로 행적은 차츰 친일로 기울어지더니 이름도 香山이라고 바꾸고 1938년부터 본격적인 친일행각에 나섰다. 일제(日帝)치하의 암울했던 시기에 조선 청년들의 희망이요 등불이였던 춘원이 끝까지 지조를 지키지못하고 일제의 주구(走狗)로 변한 것이다. (아쉽다. 몇년만 더 참으실 것을).

단편소설 < 꿈>을 썼을 때 이광수는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변절자” 라는 비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태수의 딸에 대한 사랑의 욕망을 이지기 못해 승려의 계율을 깨고 야반도주한 조신의 모습에서 춘원은 아마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허영숙과 결혼을 위해 조선행을 택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춘원은 깊이 깨달았다. “一切皆空에 色卽是空이라, 온 세상 모든 것이 헛 것(空)이니 눈 앞에 보이는 모든 현상(色) 역시 빌 공(空)이구나.”

춘원의 단편 <꿈>은 1967년 신상옥 감독에 의해서 다시 영화로 제작되었다. 그러고 보니 춘원도 옛사람이고 신상옥 감독도 이미 흘러간 사람이다. 참으로 덧없는 것이 찰라의 인생임을 알겠다.

(아래는 이곳 한국일보 8월 23일자에 실린 拙筆 칼럼입니다)  신라 서라벌 근처에 세달사(世達寺: 지금의 興敎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의 농장이 명주(溟州)에 있어서 본사에서는 조신이라는 스님을 농장 감독으로 보냈다. 그런데 스님이 어느날  그 지방 태수 김흔(金昕)의 딸을 먼 빛으로 보고 그만 반해버렸다. 그래서 낙산사(洛山寺)  관음보살(觀音普薩)상 앞에서 그녀와 인연을 맻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몇 년 동안을 정성을 다해 빌었으나 들려온 소식은 태수의 딸이 좋은 곳에 혼처가 나서 얼마전 시집을 갔다는 것. 조신은 그만 낙담을 하여 관음상 앞에서 “이럴 수가 있냐”고 화를 내며  원망하여 슬피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잠결에 누가 깨워서 눈을 떠보니, 아! 글쎄, 그 태수의 딸이 활짝 웃으며 서있는 것이 아닌가?  “내 일찍이 스님을 보고 사랑하여 잊지를 못했지만 부모의 명에 못이겨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스님과 부부가 되고자 왔으니 같이 도망가서 삽시다.”  조신이 미칠 듯이 기뻐서 이 아가씨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40 여년을 재미있게 살면서 아이를 5명이나 두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점점 가난해지더니 나중에는 먹을 것 잠잘 곳 조차 없어졌다. 그래서 식구들을 이끌고 빌어 먹으며 한 10년을 돌아다니니 꼴은 거지중에 상거지.  그러다가 명주 해현령(蟹縣嶺)을 지날 때 15세 된 큰아이가 굶어 죽었다. 조신은  얼마나 기가 막히는지 가슴을 치고 울면서 아이를 길가에 묻었다. 나머지 4 자녀를 데리고 부부는 우곡현(羽曲縣: 지금의 우현)에 이르러 길가에 볏집을 짓고 살았는데 부부가 늙고 병들어서 거동하기가 힘드니까10살 난 딸이 밥을 빌어다가 식구들을 먹였다. 그러나 어느날 밥을 구걸하려 다니던 딸이 마을 개에게 물렸다. 아이가 아픔을 참지 못하고 울부짖으며 돌아와서 들어누으니 부모도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참 울다가 부인이 눈물을 씻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는 얼굴고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옷도 깨끗했습니다. 집을 나온지 50년, 정도 깊어지고 사랑도 굳어졌으나 근년에 와서는 굼주림으로 몸도 쇠약해지고 추위도 날로 더해 오는데 걸식하는 부끄러움이 산과도 같이 무겁습니다. 붉은 얼굴과 아리따운 웃음도 풀잎의 이슬이요, 지초(芝草)와 난초같은 굳은 언약도 버들가지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하니 엣날에 기쁘던 일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나 봅니다. 당신과 내가 어찌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이제 당신은 내가 있어서 누(累)가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더 근심이 됩니다. 우리 여섯 식구가 함게 다니면 모두 굶어 죽게생겼으니 이제 헤어져서 각기 살길을 찾아 봅시다.”  그래서 아이 둘 씩 맡아 아내는 친정이 있는 방향으로  가고 조신은 남쪽으로 울며 떠나다가 그만 잠이 깨었다. 이미 아침 예불을 알리는 인경 소리가 산사에 울려 퍼지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밤새 머릿 털이 하얗게 세었다. 하룻밤 꿈에서 인생 50년을 산 것이다. 인생무상,  즐거움도 괴로움도 다만 한 마당의 꿈이라는 것을 깨닿고 보니 세상사에 집착하는 마음이 눈녹듯이 사라진다.  “있지도 않은 자식을 잃었다고 그렇게 슬피 울었구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조화인 것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상 앞에서 한없이 참회하고 해현령에 가서 아이를 묻은 곳을 파보니 거기에 돌 미륵이 있었다고. 고려 때 일연 스님이 쓰신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얘기이다.  춘원 이광수가 이 설화를 바탕으로 <꿈 />이라는 단편 소설을 발표한 것은 해방된지 얼마안된 1947년이다. 이광수는 1918년 2.8 독립선언을 주도하였고, 1919년 상해임시정부 설립에 참여하여 임정 홍보국장과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한 항일민족주의자였으나  임시정부의 열악한 재정형편과 임정내부의 파벌 싸움에 실망한데다가 당시 국제사회에서 욱일승천하는 일본의 기세를 보며 조국 광복은 전혀 희망이 없다고 느꼈다.   그러던 중 두번 째 부인이 된 당시 최초의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이 상해까지 와서  설득함으로 춘원은1921년 귀국하였다. 그리고 귀국한 춘원은 한동안 글만 열심히 썻으나 일제의 계속되는 회유로 행적은 차츰 친일로 기울어지더니 이름도  香山이라고 바꾸고 1938년부터 본격적인 친일행각에 나섰다. 일제(日帝)치하의 암울했던 시기에 조선 청년들의 희망이요 등불이였던 춘원이 끝까지 지조를 지키지못하고 일제의 주구(走狗)로 변한 것이다. (아쉽다. 몇년만 더 참으실 것을).  단편소설 < 꿈>을 썼을 때 이광수는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변절자” 라는 비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태수의 딸에 대한 사랑의 욕망을 이지기 못해 승려의 계율을 깨고 야반도주한 조신의 모습에서 춘원은 아마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허영숙과 결혼을 위해 조선행을 택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춘원은 깊이 깨달았다.  “一切皆空에 色卽是空이라, 온 세상 모든 것이 헛 것(空)이니 눈 앞에 보이는 모든 현상(色) 역시 빌 공(空)이구나.”  춘원의 단편 <꿈>은 1967년 신상옥 감독에 의해서 다시 영화로 제작되었다. 그러고 보니 춘원도 옛사람이고  신상옥 감독도 이미 흘러간 사람이다. 참으로 덧없는 것이 찰라의 인생임을 알겠다.굶어 죽은 아들을 안고 울부진는 조신. 사실 있지도 않은 아들을 잃었다고 슬피울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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