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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소나타 -김정수 칼럼-

2014.10.02 12:47

wind 조회 수:5195

 

모 종합건설회사의 상무 나승규는 가정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평생 일 밖에 모르고 살아온 고지식한 사람이다. 회사에 기여한 바도 커서 승승장구 승진하니까 주위에서도 사장까지는 무난하겠지, 하고 기대하던 유망주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고문’이라는 한직으로 밀리더니 이어서 사표를 내고 실직자가 된다. 아주 오래전 서울의 SBS 창사특집 드라마 ‘가을 소나타’의 주인공 얘기이다. 잘 나가던 시절, 아내가 “당신 언제까지 직장생활을 하겠느냐? 노후대책도 세워야 할 것 아니냐”고 걱정해도 정작 당사자는 “직장생활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바로 노후대책”이라고 생각하고 외골수로 그저 일만 열심히 하던 친구이다. 회사를 그만둔 지금 모아 놓은 재산도, 달리 살아갈 뾰쪽한 방법도 없다.

 

퇴직 후 얼마간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서 아침 출근 시간에 남의 자동차를 회사에서 보낸 자기 차 인 줄 알고 올라타기도 하고, 분명히 어디를 간다고 갔는데 정신이 들어보니 자기가 다니던 회사 근처에 서성거리고 있는가 하면, 언젠가는 자다가 일어나서 누가 부탁하지도 않은 무너진 ‘성수대교’ 복구공사 비용을 산출하고 있다. 그러면서 젊음을 다 바쳐서 일했던 직장에서 이런 식으로 버림을 받았다는데 배신감에 몸을 떨기도 하고 내가 바보였나 싶어서 후회도 하지만 그러나 “나는 바보가 아니야, 세상이 나를 바보로 만들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을 같이 하자는 동창생에게 사기 당해서 남은 재산 하나인 아파트마저 빼앗기고 집안 식구들은 모두 흩어진 채 자신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드라마는 끝난다.

 

남자들에게 직장이라는 것은 나름대로 ‘자기 존재이유’를 나타내는 곳이다. 직장이 있음으로 거래처 아는 사람도 생기고, 사회활동도 하게 되고, 또 사나이가 한 목표를 세워서 달성하는 보람을 느낀다. 그런데 그런 직장이 없어지면 이 모든 관계가 깨어지고 어긋나 버린다. 따라서 극중의 나 상무처럼 어느 날 갑자기 퇴직하는 사람은 단순히 생활 터전을 잃었다는 것 보다 자기의 존재가치가 상실되었다는 데서 더 큰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통운 지점장 시절 새로 부임한 본사 사장이 상항 우리 지점에 방문하여 현황보고를 받고 떠나는 자리의 공항에서 나에게 해직을 통보했다.

 

우리의 세대는 과거에 “수출고지 1억 달러”를 대견해 하던 70년대 ‘수출의 역군’이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건설의 주역’들이다. 그리고 다들 한 번 잘 살아보자고 허리끈을 조이고 땀 흘리며 앞만 보고 뛰기만 한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소홀히 한 채 그저 껍질로만 바쁘게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극중의 나 상무처럼 퇴직 후 극심한 혼란에 빠지고, 분노하고 좌절하면서 스스로를 무너트리는 경우가 그래서 많지 않은가 싶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의 경우, 평생의 대운(大運)이라는 것은 해직된 다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나처럼 고지식한 사람이 타의로 해직이 되어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평생 월급쟁이만 하다가 인생 끝냈을 것이다.

 

그러니 다니던 직장에서 물러나거나 사업을 접었다고 바로 인생이 끝난 것은 절대 아니다. 호흡하는 매 순간마다, 딛는 걸음걸음 마다 우리가 보질 못하고 찾질 못해서 그렇지 나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사명이 이 세상에 반드시 있다는 것을 나 상무는 알았어야 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종점이지만 내리지 않으면 출발점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직장을 그만 둔 것이지 인생을 그만둔 것이 아닌 것이다. 나는 회사에서 해직을 당한 후 창업이라도 했기 때문에 이 만큼이나마 노후를 준비할 수 있었다.

 

인생여희 희여인생(人生如戱 戱如人生), 인생은 연극과 같고 연극 또한 인생과 같다는 뜻이다. 한 시대가 하나의 무대라면, 거기에는 제각기 출연하는 배역과 인물이 따로 있는 것.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의 이 배역에서 열과 성의를 다 할 뿐 무대 자체에는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무대에서 내려오면 무대는 다음의 출연진에 의해서 다시 메워질 것이고, 무대에서 내려온 나는 다음의 장()에서 또 새로운 드라마에 출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은퇴한 요즘의 나는 아직 오지않은 내 생애 최고의 무대를 기다리고 있다. 거기서 나는 내 생애 가장 멋진 연기를 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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