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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墨香) -김정수 칼럼-

2014.07.08 12:30

wind 조회 수:6043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안동 김씨 세도 밑에서 죽어지내면서 묵화라도 그려 팔아야 생계에 보탬이 되는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사동(寺洞)에 산대서 사동대감이라 불리던 안동 김씨의 실세 김병국(金炳國)은 이 몰락한 왕족에게 가끔 쌀 섬이라도 지워 보내고 명절이면 갈비짝이라도 보내는 인간적인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 흥선군은 자신이 그린 묵화(墨畵)를 대신 사동대감에게 답례로 보내고는 하였다. 그러다가 이 가난한 왕족은 그만 재미가 들어서 이제는 궁할 때마다 자기편에서 묵화를 들고 사동대감을 방문하고는 하였는데 그때마다 사람 좋은 사동대감은 굴비 짝을 하인 시켜 들려 보내거나 섭섭지 않도록 용돈이라도 주어서 답례하고는 하였다.


그런데 그것도 한 두번이지 시도 때도 없이 신통치도 않은 묵화를 들고 와서는 죽치고 앉아 있는데는 대감도 때로는 짜증이 났었던 모양이다. 한번은 흥선군이 가져온 묵화를 들여다보면서 점잖게 한방을 먹였다. “어째 영감 솜씨가 전에 보다 영 못하오.” 흥선군은 얼굴은 붉히면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벼루를 탓했다. “그 동안 벼루를 죽여 놓았더니만...”

글을 쓰는 선비는 벼루를 사람인양 비유하여 사흘 동안만 벼루를 갈지 않으면 벼루가 죽어서 먹을 잘 풀어 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며칠 벼루를 쓰지 않았다고 있는 솜씨가 도망가고 지닌 학문이 사라질까. 무안한 나머지 벼루를 탓하는 흥선군의 심정은 그 순간 얼마나 쓰리고 초라했을까?


그후 세상이 바뀌어 흥선군이 大阮君이 되어 안동 김씨를 탄압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김병국이 정치적으로 살아 남아 이후 영의정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과거의 신세를 잊지 않은 대원군의 각별한 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원군이 안동 김씨에게서 당한 것은 인간적인 수모(受侮) 그 자체였다. 오죽이나 김씨들이 흥선군 이하응을 우습게 보았으면 그를 ‘喪家집 개’라고 불렀을까. 그래서 몇 번이고 안동 김씨에 대한 피의 숙청이 대원군 치하에서 있을 뻔하였지만 그 때마다 사동대감 김병국의 중재로 위기는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대원군은 四君子 중에 특히 蘭을 즐겨 쳤다고 한다. 그의 난을 보면 우리 같은 사람이 보기에도 거침없이 뻗어 올라갔다가 과감하게 삐쳐 내리는 잎줄기에서 그의 포부와 강인한 의지가 엿보인다. 그러나 대원군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기본 기법을 소홀히 하고 잔손질에 약한 것이 흠이라는 評도 있다.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작은 것부터 잘 지키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어쩌다가 자신의 며느리에게 꺾여야 했던 대원군의 웅지를 나는 그의 蘭을 보며 아쉬워한다.


대원군의 큰 실책중의 하나로 쇄국정책을 꼽고 있지만 당시 쇄국주의는 주변국의 일반적 추세였다. 청나라에서는 洋夷들과 개국만 하면 천지가 개벽되는 줄 알았고, 메이지(明治)유신 전의 일본에서 ‘開國’은 바로 ‘賣國’을 뜻하였다. 대원군의 識見도 따지고 보면 역시 그 시대의 産物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대원군은 노련한 감각을 지닌 정치가였다. 주위 상황을 보아서 필요하다고 확신만 되었다면 충분히 외교정책을 바꾸고도 남음이 있었을 인물이다. 역사를 論함에 假定은 금물이지만 아마 조선의 정치력이 대원군 밑에 옹골차게 집결만 되어 있었더라도 그처럼 어처구니없이 나라를 빼앗기지는 않았으리라 싶다.


필자가 섬기던 교회에 서예에 조예가 깊으신 장로님이 한 분 계셔서 많은 교인들이 예배 후 서예 지도를 받았다. 교인들 틈에 앉아 먹을 갈고 붓을 고르노라면 방안에 번지는 묵향부터가 우선 은은하던 기억이 새롭다. 香중에 제일은 묵향(墨香)이라고 했던가. 먹을 듬뿍 묻혀 획을 올려 난을 쳐본다. 문득 흥선 大阮位 대감과 감히 역사를 논하고 인생을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스친다. 한말의 풍운도, 대원군의 웅지도 지나고 보면 붓끝에 그려진 다만 한 폭의 그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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