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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뭐너메이커 -김정수 칼럼-

2014.09.12 14:36

wind 조회 수:4764

돈을 잘 번다는 것도 큰 재주에 속한다. 그러나 번 돈을 잘 간수하고 쓸 곳에 제대로 쓸 줄 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경륜이다. 지난번 본 칼럼 “일곱 장의 벽돌”의 주인공 존 워너메이커의 전기를 읽으며 필자는 기업가의 경륜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다.

 

1838년 필라델피아 근교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가정 형편 상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한 사람이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판단한 존은 14세 때 옷 가계 “꼬마둥이”로 취직하여 소위 장사라는 것을 배워서 23세에 동업으로 옷 가계를 하나를 오픈 한다. 한 벌에 단돈 3 달러의 싸구려 신사복 가계였다.

 

다른 점포는 보통 아침 10시에 문을 여는데 존 워너메이커는 아침 6시에 문을 열고 주인 스스로 문 앞에서 손님을 안내하는 극성을 부렸는데도 매상은 형편이 없어서 급기야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다. 생각다 못하여 자기 가계 이름 “OAK HALL"이라고 쓰여진 간판을 100 피트 높이로 세우고, 수 백개의 풍선에 OAK HALL 이름과 줏어 오는 사람에게 셔츠를 한 개씩 준다는 문구를 새겨서 띄웠다. 결과는 대 히트였다. 여기서 그는 “값이 싸다고 손님이 몰리는 것도 아니고,..주인이 바지런을 떤다고 장사가 잘 되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는다. 거기에 프러스 “알파”가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장사가 잘 될 수록 점포를 늘렸다. 큰 창고를 임대하여 아동복, 여성복, 신사복등 각기 상품 종류 마다 칸을 만들어 진열하여 판매를 시작하였다. 근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백화점이 탄생한 것이다. 토마스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하자 이것을 점포에 처음 설치하였고, 또 업계에서는 처음으로 신문에 “전면광고”라는 것도 내었다. 제단공장까지 인수하자 직원은 3천명으로 늘었다. 당시로 보아서는 대단한 기업으로 성장하였지만 워너메이커 사장은 매일 정시에 출근하여 제품의 품질을 직접 점검하면서 종업원들의 아이디어를 수시로 경청하였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손해보는 거래는 앞으로 결코 지속될 수 없는 거래라는 것이 그이 지론이다. 따라서 거래라는 것은 상호 이익이 되는 범위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공급자가 손해를 볼 정도로 싼 금액으로 납품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자신도 원가 이하의 세일 따위는 가급적으로 하지 않았다. 또한 “신용 없는 사람과는 결코 거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 하였다. 물건을 싸게 팔 수도 있고, 거저 줄 수도 있다, 그것은 앞으로의 영업촉진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용 없는 사람은 “볼 필요도, 만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워너메이커는 동업경영(PARTNERSHIP)을 선호하였다. 처음에는 처남과 동업하였고 또 친구와, 나중에는 심지어 동생과 아들들까지 동업자로 끌어드렸다. “한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세 사람 네 사람의 힘이 나올 수 있고 세 사람이 힘을 합하면 열 사람 스무 사람 능력이 발휘될 수 가 있다.” 절대로 동업하면 안된다는 한국인들의 경영상식과 참으로 대조되는 견해가 아닌가.

 

해리슨 대통령 정부에서 체신부 장관으로 있을 때에도 국가 독점 사업의 무사안일한 타성에 젖어있던 체신공무원들에게 “기업경쟁”이라는 것을 일깨웠다. “마치 바로 길 건너에 너의 경쟁 가게가 생겼다고 생각하라.” 서비스 지역을 시골 구석구석까지 확대한 것 이외에도 우편저금, 소화물 우편서비스, 전보취급 등은 모두 그가 재직할 때 처음 시작한 업무들이다자수성가하여 장사를 잘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으로 치면 워너메이커 이외에도 수 없이 많은 기업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세의 우리가 그의 경륜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는 버는 만큼이나 많은 돈을 사회에 환원시켰기 때문이다.

 

만년에 어느 기자가 물었다. “귀하는 도대체 어떤 가치관을 가지 셨길래 돈을 벌어서 극빈자 병원을 건립하고, 학교기관을 지원하고, 불우이웃을 돕고, 교회와 YMCA를 건축하는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공익사업을 하였습니까?” 워너메이커는 멋쩍은 표정으로 하늘을 가르켰다. “내 돈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다 저 분의 뜻에 따라 저 분의 것으로 한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워너메이커의 기업경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맡아서 성실하게 관리하고, 그것을 그의 뜻에 합당하도록 행사하는, 청지기로써의 사명감에 철저하게 바탕을 둔것이었다.

 

필자의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나름대로 사업체를 찾는 안목도 있고 가게를 경영하는 확실한 방법도 서있다. 그러나 돈을 번 다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대부분 내 세울만한 철학이 없다. 수익이 더 좋고 편안한 사업체를 찾아본다거나 부동산에 투자한다거나 아니면 기껏 세금 안낼 궁리만 하는 것, 참으로 워너메이커를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필라델피아에 출장을 갔었을 때 틈을 내어 델라웨어(Delaware)강변에 있는 베다니 장로교회를 찾아 보았다. 이제 어린 워너메이커가 벽돌을 깔아 놓아야할 정도의 진흙뻘은 이미 볼 수 없고, 다만 주택가에 둘러싸인 이 석조 건물은 마침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며 초라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바로 이 교회에서 어린 소년 존 워너메이커가 유년주일학교에서 청지기의 사명을 배웠던 것이다. 그리고 이 교회에서 자란 워너메이커집사가 백화점왕이 되고 장관이 되어서도 평신도 집사 주일학교 교사로 충성하였으며 생전에 50여 교회를 세우고 22개의 YMCA 건물 - 그 중 하나는 서울 종로에 - 지었던 것이다. 필자는 무심코 그 교회 좌석을 세어 보았다. 잘해야 100명이나 들어갈까한 자그만 교회였다.

 

한 인간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업적이라는 것은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에서 볼 때 하나의 보잘 것 없는 작은 점에 불과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 작은 점들이 하나 하나 연결 고리가 되어 전체 역사의 가치를 형성하드시 존 워너메이커의 성실한 삶과 그의 청지기 사명이 하나의 연결고리가 되어 이 세계를 보다 밝게, 보다 아름답게 가꾸는데 기여 하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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