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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鳴梁) -김정수 칼럼-

2014.08.21 15:32

wind 조회 수:5676

  요즘 우리 동네에는 온통 영화 <명량>이 화제이다. 역사를 알고 영화를 보면 더 실감이 나겠다 싶어서 명량해전에 관한 자료와 문헌을 찾아 보았다.


1597 9(음력)의 명량해전이 있기 두달 전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의 수군은 칠천량(漆川梁)에서 괘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원균은 적의 유인작전에 걸려서 무리하게 추격을 하다가 거의 재기불능의  피해를 본 것이다. 조선 수군의 손실은 거북선을 포함한  판옥선 288척과 수천의 병력이다이제 남해의 제해권을 잡은 일본 수군은 여차하면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서울까지 위협한 판이다.


이렇게 전세가 다급해지자 (염치도 좋지) 임금 선조는 삭탈관직 당하고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다시 복권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이순신은 재임명 교지를 받고 담담하게 장계를 올린다.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 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이충무공전서).


명량해협은 속칭 울돌목으로 진도와 해남땅 화원(花源)반도 사이에 있는 해협인데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아서 폭은 중형 선박 3척이 횡대로  겨우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밀물 때는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가서 서해로 빠져 나가고 썰물 때는 물이 반대 쪽으로 쏟아지듯 급하게 밀어닥치는 가운데 물살이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암초에 부딪혀 무섭게 소용돌이를 치는 곳이다. 이순신은 바로 여기서 적 수군을 섬멸하기로 작전을 세운다.


한편 어란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수군은 구루시마 미치후사도도다카도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등이 지휘하는 333척의 대함대에 병력은 2 6600. 이에 맞선 조선 수군은 전선 13척에 병력 1170. 숫자로 보아서는 도저히 게임이 않되는 싸움이였다. 일본 수군의 작전은 압도적인 다수의 병력으로 명량해협의 급류를 타고 신속하게 쳐들어가서 잔존하는 조선 수군을 격파하고 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것이다. 따라서 급류가 흐르는 좁은 해협에서 작전이 용이하도록  무겁고 큰 전함인 <安宅船: 아께다부네>를 뒤에 두고 가볍고 빠른 중형 전함인  <關船: 세께부네>를 공격부대로 배치시켰다. 그러나 세께부네는 날렵하고 빠르기는 하지만 선체가 약해서 배끼리 부딧쳤을 때 깨지기 쉬우며 가벼워서 포를 장착할 수 있는 없는 약점이 역시 있는 것을 일본 작전 수뇌부는 간과하였다.


이순신도 명량 전투 하루전날 공포에 질린 장병들에게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는 오자의 병법을 인용하면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輕 足懼千夫)”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명령하였다.


적의 함선이 명량으로 진출 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곧 12(한척은 수리중)의 전선으로 전투 태세를 갖추는 한편 피난민들이 타고 있던 100여 척의 민간인 배를 후방에 배치하여 각색의 깃발을 휘날리게 하여 아군의 숫자가 많은 것처럼 적을 기만하였다. 구루지마를 선봉으로하는 적의 함대 133대가 3 열 종대로 밀물을 타고 쏜 살같이 노량해협의 좁은 공간으로 쇄도하자  이순신의 지휘선은 닷을 내려 배를 조류로부터 고정시키고 앞에 닥아오는 적선부터 함포와 천자(天字) 총통, 지자 총통 등 각종 화기를 발사하여 적선을 차례차례 파괴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병사들은 지쳐가고 화약은 바닥을 보인다. 그러자 적은 여러겹으로 이순신의 지휘선을 포위하니 상황이 일시 급박하게 돌아가는듯 했다. 아군의 다른 함선들은 적의 기세에 눌려 주춤주춤 여차하면  배를 돌리려고  뒤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순신은 분노하였다. 초요기(招搖旗)를 올려 뒤로 물러나 있던 중군장 첨사 김응함과 거제도 현령 안위를 앞으로 진격해 오도록 한 뒤, 그들을 심하게 다그쳤다. “안위야, 싸우다가 죽고 싶으냐군법에 의해 죽고 싶으냐!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이순신의 정유일기- 두 사람의 전선이 분발하여 적진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자 평산포 대장 정응두와 멀리 대략 1 km 정도 물러나 있던 전라우수사 김억추도 돌격에 가세하였다

오후가 되자 조수의 흐름이 바뀌었다. 아군은 적 방향으로 쏜살같이 흐르는 물결을 따라 일제히 돌격하여서 갈팡질팡하는 적을 격파하였으며, 선봉장 구루시마를 사살하고 지휘함에게 집중 포격을 가해서 총대장인 타카도라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 이로써 울돌목 안으로 들여보낸 일본 전투함대 133척 중에 31척이 격침되고 92척이 파손되어 도주하고  18,466명이 전사하였다. 아군의 피해는 전함의 손실 없이 사상자만 100명 미만. 이순신 장군도 그날 전투에서 아군의 전력이 역시 많이 소모되었음을 알고  도주하는 적을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사를 다시 읽는다.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정읍 현감으로부터 전라좌수사로 파격 승진한 이순신은 부임이래 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화포를 만들고, 개량하고, 함선을 건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최초로 함대함전(艦對艦戰)의 함포 전술을 고안해 낸다. 이때까지 해전이란 배를 맞대고 백병전을 치루는 것이었으나  이순신은 포격전이 대세를 이룰 장차의  해상 전투 모습을 예상하고 이에 알맞는 진법 및 사격 훈련을 구상해 냈다. 또한 전쟁을 준비하는 한편 농사를 지어 군량미도 확보해야 했다. 이순신은 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영의식이 출충한 지도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동안 23번 싸워서 23번 이겼다. 그러나 한번도 모험을 하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작전에 무리가 없었고 위험한 곳에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를 살펴서 항상 유리한 시기를 선택하고 자기가 원하는 장소로 적을 유인하여 격파하였다. 역시 명장은 기적을 창출하지 않는다. 엄연한 사실을 가장 상식적으로 대처해 나갈 뿐이다

최민식과 류승룡이 주연한 영화 명량의 관객이 1500만은 넘었단다. 그리고 여기 미국에서도 극장 표가 연일 매진이란다. 영화를 보면서 그럴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사람 맥박 어딘가에 잠재된 민족의 함성이 영화 매 장면마다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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