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환상곡

봉기군의 핵심은 런던에 있는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휘를 받는 AK군 (ARMIA KRAJOWA: Home Army라는 뜻) 4만 명 정도 였는데 그들의 무기라고는 소총 1천 정 , 권총 2천 정에 자동화기 60 여 정, 그리고 사제 수류탄 정도였으니 이런 한심한 화력으로는 도저히 독일군과 힘으로 맞설 수는 없었다. 그러나 AK군 수뇌부는 사태를 낙관하였다. 소련군은 와르소의 바로 코 앞에 와 있다. 일단 와르소에서 봉기만 일으켜서 소련군의 요청 대로 독일군의 후방을 교란 시키면 곧 바로 소련군이 전선을 제압할 것이다. 그리고 봉기군이 시내의 주요 간선 도로 만 이라도 점령하여 무력을 시위한다면 기왕 사기가 저하되어 있는 와르소 수비 독일군은 쉽사리 붕괴되어 패주 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전투중인 봉기군

그러나 그것이 큰 오산 이였다. 봉기 2일 째 되던 날까지 시민군은 와르소 시내의 대부분을 점령하기까지에는 성공하나 그후 부터 수비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그리고 대 소 작전 중이던 독일군 예비병력(주로 기갑부대) 수 개 군단이 즉시 와르소에 투입된 것이다. 다시 수세에 몰린 봉기군은 이후 63일간 외부의 도움없이 절망적인 저항을 계속한다. 봉기가 시작될 때 이를 적극 지원 하겠다던 소련군은 와르소까지 VISTULA 강 하나 만 건너면 되는 위치에 있었으나 봉기군이 독일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되는 동안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른바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이 나치스에 의하여 완전 도륙(屠戮)될 때까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일이 지나감에 따라 고립무원(孤立無援)의 봉기군은 이제 각 소 단위 부대로 건물 마다 고립된 채 하나 씩 지리 멸렬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바드니 소위의 소대가 있는 건물에 AK군 사령관 코모로브스키(TADEUSZ BOR KOMOROWSKI) 장군이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사령관께서 말단 부대인 소대까지 직접 와서 격려하려는 것이다.

봉기군 사령관 코모로브스키 장군

상황이 상황인지라 사령관이 방문하셨는데 소대에서는 사령관께 대접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때 부상병을 돌보던 할머니 간호병이 앞에 나섰다. “사령관 각하께서 모처럼 오셨는데 차 한잔 대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음악 한 곡 올려 드려도 되겠습니까?” 사령관의 허락을 받은 할머니 병사는 조용히 피아노 앞에 앉았다. 밖에서는 콩 볶듯이 하는 자동화기의 소리, 포탄이 떨어져 작렬하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는데 전에 음악 선생이었다는 할머니 병사는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조국의 흙 한 줌을 싸들고 망명을 떠났던 쇼팽은 비록 침략군에게 유린된 조국 폴란드이 언젠가 다시 일어나 옛 영광을 되찾을 것이라는 신념을 환타지 선율에 담았다. 자바드니 소위는 지금 독일군 포화속에서도 결코 포기될 수 없는 자유의 함성을 이 연주를 통하여 듣고 있는 것이다. 부서진 피아노라서 몇개의 키는 소리를 낼 수 없었지만 할머니는 자세 하나 흐트리지 않고 열심히 연주하였다. 이윽고 곡이 끝나자 사령관은 일어나서 정중하게 감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 와르소 봉기에서 희생된 AK군과 시민은 20만 명. 소련군은 봉기군이 독일군 손에 완전히 섬멸된 후인 1945년 1월에야 와르소에 입성하여 공산 괴뢰정권을 수립한다. 자바드니 소위는 전투중 기관총 총상을 입고도 구사일생 살아 남아서 미국에 와서 학위를 마치고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의 저서 “NOTHING BUT HONOUR: THE STORY OF THE WORSAW UPRISING, 1944"는 자신의 전쟁 체험 뿐만이 아니고 냉혹한 국제정치의 상황윤리를 와르소 봉기를 통하여 논술한 것이다.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필자의 지도교수였던 자바드니(J. K. ZAWODNY) 박사는 은퇴후 와싱턴 주의 어느 한적한 마을에서 사시다가 거기서 2012년 영면(永眠)하였다. 나는 지금 쇼팽콘서트에서 우승한 우리의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연주하는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을 듣으며 전에 써두었던 이 글을 꺼내어 다시 다듬는다. 민족이, 그리고 나라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을 때, 그 때에는 엄청난 비극이 초래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어찌 폴란드인 만의 경험일까. 내 힘으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조국이다.